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스샹달 전투 (문단 편집) === 연합군의 승리 : 제 2차 파스샹달 전투 === 9월 4일 짧은 휴식기간 동안 헤이그는 런던으로 소집되어 공세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전시내각에 보여야만 했다.[* 로이드 조지가 공세를 지금이라도 멈추기 위해 8월 중순 프랑스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헤이그는 독일군이 인력의 한계까지 쥐어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파스샹달 전투 당시의 포로들 중 젊고 건장한 이들은 전부 다른 곳으로 이송 시켰다.] 기존의 고프의 방식은 당연히 미친 짓이었고 하다못해 플러머가 제시한 유기적 형태의 공세라도 유지하는 것이 옳은가를 입증해야 했다. 런던에서 수상인 로이드 조지는 곧 미국이 참전하고 러시아가 교전국에서 이탈했으며, 프랑스는 니벨 공세의 영향으로 군이 붕괴되는 것을 간신히 면한 판국에 영국군의 자원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했고 헤이그는 참모총장 [[https://en.wikipedia.org/wiki/Sir_William_Robertson,_1st_Baronet|윌리엄 로버트슨]][* Sir William "Wully" Robert Robertson, 1860 ~ 1933 / 준남작(Baronet) 작위를 받았으며 이분은 영국 육군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이등병에서 시작해서 육군원수까지 오르신 분이다.]의 지지를 받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프르에서의 공세를 계속 유지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분명 헤이그의 전략은 무모했고 영국의 역량을 한계까지 끌어내는 것이었지만 헤이그보다 더 나은 인물과 계획이 없다는 이유로 결국 헤이그의 공세를 지속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진다.[* 헤이그는 회의 이후 독일이 금방 무너질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그 승리가 1년 하고도 2개월 뒤라는 건 둘째치더라고...) 로이드 조지는 '''경주에 질 말에 돈을 걸었다'''고 마음을 굳혔다. 로이드 조지가 조언을 구했던 [[https://en.wikipedia.org/wiki/Sir_Henry_Wilson,_1st_Baronet|헨리 윌슨]]과 [[https://en.wikipedia.org/wiki/John_French,_1st_Earl_of_Ypres|존 프렌치]] 장군은 파스샹달 전투에 대해 당장 작전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 했다.] 젊고 성급한 성격을 지닌 후버트 고프와 다르게 [[허버트 플러머]]는 신중했으며 자신이 맡은 병사들을 걱정했다. 플러머는 2년 동안 이프르 구간을 지휘했으며, 위험 장소를 모조리 알고 있었고 사병들의 복지를 걱정하여 병사들로부터 1차 대전의 장군 중에서는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이제 플러머는 다음 단계를 조심스럽게 준비하려면 휴식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플러머는 동시에 이 기회를 이용해 보다 유기적인 공격 전술을 도입했다. 공격 시 먼저 [[보병]]들이 산병선을 이루며 전진해 나가면 방어 거점과 토치카를 우회하기 위해 느슨하게 배치된 소규모 보병 팀들이 그 뒤를 따를 예정이었다. 각각의 팀은 밀스 [[수류탄]] 투척병과 루이스 기관총 사수, [[총류탄]] 사수들을 보유하고 독립적인 작전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이 한 차례 독일군 방어선을 뚫고 나가면 소규모 부대들이 후속하여 앞서 전진한 부대들이 남겨 놓은 잔적을 소탕하고 선두 공격 부대를 지연하는 후방 부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공격 부대 뒤에는 항상 보병 예비대가 배치되어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독일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이들은 반격에 나선 독일군에게 치밀하게 계획된 포격과 기관총 탄막 사격을 집중적으로 가할 예정이었다. 플러머는 제한된 목표물에 대한 치밀하고도 단계적인 공격 전술을 철저히 훈련시켰다. 이러한 전술은 고프가 시도한 것보다 한층 더 얕게 독일군 전선을 연이어 침투하는 형태가 될 것이었다. 이 무렵 비가 그치고 건조한 날들이 이어지는 등 기상 조건까지 유리해졌다. 공격에 나선 영국군은 9월 20일에서 25일에 걸쳐 벌어진 메냉가도 능선 전투 및 9월 26일에서 10월 3일에 걸쳐 벌어진 폴리곤 숲 전투와 같은 소규모 전투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이러한 작전들에 공을 세운 것이 바로 제1안잭군단(Anzac, [[호주]]-[[뉴질랜드]] 연합군)이다. 9월 초 수 많은 영국 원정군을 익사시킨 비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가 지나고 건조한 날씨가 오자, 영국군은 빠르고 유기적인 공세와 독일군의 포격에 대비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여 독일군의 반격사단에 맞서 소기의 성과를 이뤘다. 독일군은 플루머의 집중화된 포병 사격와 빠른 유기적 공세로 인해 반격사단의 진로에 병목현상이 일어나 많은 골치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건조한 날씨가 무조건 영국군에게 이점만을 주진 않아, 저지대에 있던 영국군은 고지대에서 진지를 구축한 독일군의 방해로 인해 제대로 된 탄약공급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9월 20일에서 25일 사이에 이프르 돌출부에서 일어난 메냉 가도 전투는 플러머의 유기적인 공격 전술과 이프르 전역이 연합군의 실패로 끝났다고 판단한 독일군 지휘관의 방심, 그리고 플랑드르 지역의 습윤한 안개를 이용한 대량의 물량 준비와 더불어 항공지원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통해, 제공권을 통한 정보 획득과 지원 공격으로 겔루벨 고지 근방의 독일군 전선 부대와 반격사단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로 10월까지 플러머는 성공적인 공세를 이어나가게 된다. 9월 26일에서 30일 사이의 폴리곤 숲 전투는 건조한 날씨와 더불어 아침 안개를 이용한 영국군의 공세로 플랑드르 1 방어선의 상당부분을 점령함과 동시에 독일제국군 제4군에 13,500의 사상자를 입히는데 성공한다. 이 전투에선 특급 방어가로 알려진 로스베르크도 영국군의 포병화력과 집중 공세에 두 손을 들어버렸다. '조금 빼앗고 지킨다' 방식의 플러머의 공격 전술이 큰 효과를 거두면서 이프르 일대의 독일군은 유기적인 종심 방어 체계를 버리고 다시 한 번 더 많은 전력을 동원하여 전방 방어선을 지키는 전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종심 방어 전술로는 플러머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던 독일군으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구식 방어 전술은 전방 방어선의 병사들이 영국군의 치열한 포격을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게 문제였다. 30일 부턴 독일군도 날씨가 허락하는 족족 가스공격을 시작하였으며, 9월 26일과 10월 3일에 최소 24번의 공세를 가하고, 그 후에도 조네베커 주변 지역을 수복하기 위한 반격 작전이 계획 되었다. >"대격전이었고 그런 전투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대영제국 오스트레일리아군 소속 제임스 조지프 오브라이언의 일기 중 브루상데(영어로 브로드세인더 지역) 전투에 관한 일기 중에서 10월 4일 제2안잭군단이 플러머의 제3단계 공격에 투입되었다. 이 군단의 목표는 브로드세인더(프랑스어론 브루상데) 능선과 겔루벨트 고지의 동쪽 끝단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영국 제10군단은 폴리곤 숲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독일군에 대한 소탕 작업을 완료했고, 뉴질랜드 사단 역시 그라펜슈타펠을 점령했다. 그러나 주요 목표물을 점령하기는 했지만, 다시 시작된 호우로 인해 전장이 또다시 늪지대로 바뀌면서 영국군은 이러한 성과를 활용하여 전과 확대에 나설 수가 없었다. 10월 9일 파스샹달 마을 주변의 포엘카펠에서 일어난 전투는 영국원정군과 독일제국군이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무승부가 되었다. 영국군과 독일군 모두 8월의 전투 처럼 물웅덩이에 다수의 부상자들이 익사하는 참사를 겪었지만, 우중충한 날씨로 인한 통신 장애로 인해 헤이그와 플루머 모두 작전에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판단을 하여 파스샹달로의 진격을 계획한다. >"우리는 (이프르 인근) 특파부대 야영지를 떠나 전선의 파스샹달 전역으로 향했다. 가는 데 다섯 시간이 걸려 행군을 마치고 녹초가 되었다. 도착하고 25분 후(12일 오전 5시 25분) 우리는 모래 포대 너머로 진격했다. 잘 가다가 통과하기가 매우 어려운 습지에 도착했다. 그 습지를 통과하고 보니 아군 탄막이 우리보다 1.6Km 가량 앞으로 이동해 있어서 걸음을 재촉해 따라잡아야 했다. 11시 경 우리는 두 번째 목표에 이르러 오후 4시까지 머무른 뒤 후퇴해야 했다. (...) 기관총 총알과 유산탄 파편이 사방에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목숨을 건진 것은 오직 신의 뜻이었다." -대영제국 오스트레일리아군 제3사단 35대대 소속 제임스 조지프 오브라이언의 일기 중에서 제1차 파스샹달 전투에 관한 일기[* 출처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저서 "몽유병자", 여담으로 제임스 조지프 오브라이언은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외종조부였고, 그는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가장 전투에 안달이 난 사람들이 전투가 시작되면 누구보다 먼저 똥오줌을 지렸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아내 니나 뤼브렌의 조부 율리우스 뤼브렌도 파스샹달 전투에서 독일군으로 참전했다.] 10월 12일 파스샹달 마을 주변에서 일어난 제1차 파스샹달 전투가 일어난다. 비로 인해 늪지가 된 땅에서 공세의 주축인 안잭(ANZAC)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수백명의 부상자들이 물 웅덩이에 갇혀 익사하는 참사가 일어난다. 독일군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역시 막대한 피해로 인해, 방어에 나선 2개 사단을 후방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2007년 뉴질랜드 사학자 글린 하퍼(Glyn Harper)는 뉴질랜드군 역사상 가장 암울한 날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솜전투와 아라스 공세 다음으로 일 평균 사상자 수가 세 번째로 많은 전투이기도 하다. 제2차 파스샹달 전투가 개시되기 직전 [[말메종 전투]]가 일어났고, 프랑스군은 과거 니벨 공세의 치욕을 씻고 독일 제국군에 제대로 설욕하는데 성공한다. 10월 26일에서 11월 10일 제1차 파스샹달 전투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뉴질랜드 사단을 대신해 캐나다 군단이 투입되어 제2차 파스샹달 전투에 투입된다. 11월 6일 마침내 캐나다 군단이 파스샹달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파스샹달 마을은 이 무렵 거대한 돌무더기로 바뀌었고, 11월 10일, 마침내 플랑드르 공세가 종료되었다. 무지막지한 피해를 양 측에서 입었지만, [[솜 전투]]보다 훨씬 적은 사상자였고, 1일 평균 사상자 수도 1917년 초의 아라스 공세보다 훨씬 적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